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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의 3조원을 걷어찬 사나이

페이스북의 3조원을 걷어찬 사나이

스냅챗 창업자 에반 슈피겔 …럭비공 같은 청년

남혜현 기자/ hyun@zdnet.co.kr 2013.11.30 / PM 02:09 스냅챗 , 에반 슈피겔

3조원의 인수 제안을 거절할 땐 어떤 마음일까. 아니, 어떤 배경이 있을까. 미국 씨넷이 최근 눈에 띄는 인물 기사를 보도했다. 페이스북의 30억달러(약 3조원) 인수 제안을 거절한 스냅챗 창업자 에반 슈피겔(23)의 이야기다.
슈피겔은 일약 스타가 됐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에 “싫다(No)”고 말한 이후다. 사생활이 담긴 문자를 일정 시간이 지나면 ‘펑’하고 사라지게 한 그의 아이디어에 저커버그가 반했다. 페이스북이 스냅챗을 따라한 SNS를 만들자 호기롭게 “환영한다 페이스북, 진심으로”란 광고를 낸 사람이다, 이 남자가.
씨넷의 보도는 슈피겔의 배짱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파헤쳤다.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슈피겔의 사생활이기도 하다. 보도에 따르면 슈피겔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돈과 권력, 명예가 늘 슈피겔을 따라다녔다.
■”아빠, 학교 다니기 불편해요 BMW 사주세요” 
슈피겔이 자기소개서를 쓴다면 어떻게 시작할까. 우선 그의 부모는 많이 배웠고, 많이 벌었다. 어머니 멜리사 여사는 하버드 법대를 최연소로 졸업한 수재다. 로펌인 필스버리, 매디슨앤 수트로(Pillsbury, Madison, & Sutro)에서 변호사로 일하다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했다.
아버지 슈피겔은 현직 변호사다. 로스앤젤레스(LA)에 위치한 로펌 멍거, 톨스 앤드 올슨(Munger, Tolles, & Olson) 소속이다. 헌틴텅 펠리세이즈에 있는 상류층 동네에 460만달러(약 49억원)짜리 집을 마련했다. 슈피겔에겐 두 명의 누이가 있는데, 씨넷에 따르면 우애가 돈독하다.
방학이면 개인 요리사를 대동하고 여행을 다녔다. 봄에는 마우이로, 여름엔 라호야 해변으로, 때로는 유럽으로. 누이들과 쇼핑도 즐겼다. 과외 활동도 꽤 많이 했고, 봉사활동도 다녔다. 씨넷에 따르면 슈피겔은 목가적인가정에서 야망가로 컸다.

▲ 에반 슈피겔 스냅챗 창업자 <사진=씨넷>

그런데 이같은 행복은 슈피겔의 낭비벽 때문에 깨졌다. 1990년 생인 슈피겔은, 상식적인 10대와는 다른 돈 씀씀이를 보였다. 아무리 성공한 변호사라도 아들의 지출이 과하다 느껴지면 제재를 하기 마련이다. 아버지 슈피겔과 아들 슈피겔 사이에 언성이 높아지는 일은 그가 17살이 되던 해 정점에 달했다.
“아버진 제가 자동차 같은 물건들을 너무 사랑한다고 비난할 수 있겠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가 보스 헤드폰을 얼마나 즐겨 사용하고 있는지를요.”
슈피겔이 2008년 2월에 자신의 아버지에 보낸 편지다. 이 편지엔 새로운 자동차, 그러니까 7만5천달러(약 8천만원) 짜리 ‘BMW 535i’을 사달라는 요구사항을 동봉했다. 17살이던 그는 그 시점에 이미 2006년형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당시 6천만원)를 끌고 있었다.
이같은 내용은 비슷한 시기 슈피겔 부모가 진행 중이던 이혼소송 서류를 통해 밝혀졌다. 슈피겔은 캐딜락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새 차를 원했다. BMW가 덩치가 작으니 도시에서 끌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유지비를 위해 작은 차 – 하지만 더 비싼 차 – 로 바꿔달라는 요구를 아버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 슈피겔이 17살 때 아버지에 보낸 용돈 청구서. 씨넷은 해당 문서에 대해 슈피겔 측에 설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사진=씨넷>

슈피겔의 부모는 결국 20년 만에 갈라섰다. 슈피겔은 아버지와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 아들의 씀씀이를 시험해보고 싶었나 보다. 새 집의 인테리어를 슈피겔에 맡겼다. 아들의 배포를 너무 작게 봤다. 슈피겔은 시트콤 ‘프렌즈’ 세트 디자인을 맡았던 그렉 그랜드를 고용했다.
슈피겔은 하얀 가죽을 덮은 킹 사이즈 침대를 자신의 방에 들여놨다. 벽에는 대리석 느낌이 나는 베니티안 플라스터 페인트를 발랐다. 고정된 책장을 세우고, 최고급 컴퓨터 두 대와 디자이너 책상 의자, 긴 맞춤형 옷장을 들여놨다. 지하실 영화관을 빼먹을 뻔 했다. 100인치 스크린을 단 지하 상영관은 슈피겔의 방에서 원격 조정이 가능했다.
아버지와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용돈도 문제가 됐다. 일주일에 250달러(약 27만원) 용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슈피겔은 차를 몰고 옷을 사고 맛있는 것을 먹고 친구들과 노는데 한 달에 1992달러(약 212만원)가 필요하다고 아버지에 통보했다. 용돈과 같은 금액의 예비비 2천달러도 추가로 요구했다. “인생엔 항상 예기치 못한 지출이 있으니까요.”
네블럭 떨어진 엄마 집으로 슈피겔이 거처를 옮긴 것은 아버지와 갈등이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다. 슈피겔은 새 BMW를 포기할 수 없었다. 갈등이 심해진 어느날 슈피겔은 가족 사진을 찢어버렸다. 슈피겔이 들어온 날, 그의 어머니는 결국 BMW 임대차 계약서에 사인했다. 슈피겔은 BMW를 차지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소년
학교에선 어땠을까. 학창시절의 친구들과 교사들은 슈피겔을 ‘중요한 학생’으로 기억했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고, 원하는 결과를 얻기 창의적인 방법을 선보였다는 것이다. 당시 수학교사는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슈피겔이 냈던 레포트는 그해 제출한 모든 학생들의 것 중에서 가장 훌륭했어요. 어린이들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수학을 배우고 있는지를 자세히 살폈고, 이를 정확히 이해했어요.”
슈피겔의 노력은 결실을 얻었다. 그는 프라하에서 휴가를 즐기다 스탠포드 합격 소식을 들었다.
“스탠포드의 역사에 기업가의 수사학은 깊이 새겨져 있어요. 젊은 백인 남성이 대학을 떠나 자신의 꿈에 헌신하는 이야기죠. 온갖 역경에도 그가 꿈을 쫓는 이야기, 여러 속임수를 거절하는 이야기를 듣죠. 그의 이상적인 사업 이야긴 스탠포드 문화에 동화처럼 새겨져 있어요. 그건 독특한 실리콘 밸리에요.”
남들은 수업을 들을 시기에, 슈피겔은 강연을 한다. 그것도 모교인 스탠포드에서. 슈피겔은 지난 4월 열린 ‘스탠퍼드 우먼 인 비즈니스’에 강연자로 나서 “당신 스스로를 디자인하라”는 주제로 “기업인의 신화는 나를 다시 열정으로 되돌렸다”라고 말했다.

▲ 스냅챗의 직원들. <사진=씨넷>

그렇다면 슈피겔은 언제부터 자기 사업을 하기로 마음 먹었을까. 굳이 따져보자면 슈피겔의 10대는 조금 남달랐다. 15살때 LA 소재 예술대학인 오티스 디자인스쿨에서 두 개의 수업을 들었다.
그 중 하나는 그래픽 디자인인데, 이 수업이 슈피겔에 강한 인상을 남긴 듯 하다. 디자인에 대한 관심을 심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거에요, 활판인쇄실험을 했던 그 시간을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그가 생각한 최고의 직장은 ‘레드불’이었다. 머리에 떠오르는 그 에너지 음료가 맞다.
“나는 레드불이란 브랜드를 사랑했어요. 그리고 그 생활습관이 좋았어요. 그 음료에 홀려있었죠. 나는 레드불의 일부분이 되길 원했어요.”
강연에서 슈피겔이 털어놓은 자신의 이야기다. 그는 레드불에서 일하기 위해 뭐든지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난 레드불에서 일하는 사람을 아는 친구를 찾았어요. 거기가 어떤 곳인지, 그리고 내가 거기서 일할 수 있을지를 물어봤죠. 계속 그 사람한테 전화했어요. 우리는 결국 만났고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리고 레드불을 위해 무엇이든 하기로 결정했죠.”
슈피겔의 모친에 따르면 그는 부모가 이혼소송을 벌이는 동안 레드불에서 무급 인턴십으로 일했다. 레드불에서 그는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 프로젝트를 보조하는 일을 했다. 마케팅과 관련한 업무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슈피겔의 회상은 다르다. “나는 레드불에서 어떻게 훌륭한 파티를 여는지 배웠어요. 엄청 재밌었죠.”
대학에 들어가기 전 여름, 슈피겔은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 있는 아트센터에 잠시 다녔다. 그러나 그의 흥미는 스탠퍼드에 들어가며 조금 바꼈다. 생물학을 다루는 회사에서 유급 인턴십을 했는데, 이 곳에서 그는 교사로 꿈을 바꿨다. 결국 그는 자신이 교사가 되길 확신하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났다. 케이프타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교사가 되려던 청년, IT에 눈뜨다 
디자인에서 마케터로, 다시 교사로 꿈을 바꾼 그가 기술 또는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돈 계기는 스캇 쿡 인튜이트 창업자를 만나면서부터다. 인튜이트는 중소기업의 재무재표 관리 솔루션을 공급하는 IT업체다.
슈피겔은 스탠포드 경영학 수업에서 스캇 쿡을 만났다. 쿡을 만난 슈피겔은 곧 “같이 일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쿡은 슈피겔의 부탁은 받아들였다. 그는 곧 ‘텍스트웹(TxtWeb)’이라 불린 프로젝트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인터넷 망이 넓게 깔리지 않은 인도에서 사람들이 온라인에 접근하고 SNS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일을 했다.
인튜이트에서 일한 이휴에 슈피겔은 백인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사교모임 카파 시그마에서 만난 친구 바비 머피와 함께 ‘퓨처프레시맨닷컴’이란 사이트를 만든다. 이 사이트는 학생이나 부모, 카운셀러 들에게 대학 지원 절차를 설명해주는 사이트다. 그렇지만 사이트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2011년, 슈피겔은 자신의 삶을 통째로 바꿀만한 전화를 걸게 된다.친구인 머피에게 ‘퓨처프레시맨닷컴’을 ‘사진이 사라지는 메시지’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바꿔보자는 내용이다. 스냅챗의 성공은, 바로 이 전화 한통에서 시작됐다.

▲ (왼쪽부터) 레지 브라운, 바비 머피, 에반 슈피겔.

그렇다면 스냅챗은 슈피겔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일까? 결론적으로는 아니다. 슈피겔에 스냅챗의 원형 아이디어를 가져온 사람은 역시 카파 시그마에서 사귄 레지 브라운이란 친구다. 브라운은 아이디어는 있었지만 기술은 없었다. 그는 아이디어를 슈피겔에 털어놨고, 슈피겔은 머피에게 “코딩을 해봐”라고 말한다.
셋은 토요타 드라이브에 위치한 레지던스에서 2011년의 여름을 함께 보냈다. 7월에 결과물이 나왔다. 스냅챗의 초기 모델 이름은 ‘피카부’로 낙점됐다.
그러나 셋의 공동생활은 곧 끝이 났다. 기술이 없던 브라운은 이 기간 마케팅과 특허 출원을 맡았지만 곧 조직에서 퇴출된다. 현재 브라운은 슈피겔을 고소한 상태다. 자신이 스냅챗에 초기 투자를 했고, 로고와 마스코트인 유령 캐릭터를 디자인했다며 상당한 지분을 요구한 상태다.
재밌는 점은 고소 사건 이후 스냅챗 유령 캐릭터의 변화다. 스냅챗 유령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스냅챗 측은 유령의 표정을 없앤 이유로, 다양한 이들이 SNS를 통해 즐거운 소식만 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브라운은 나갔어도, 스냅챗은 잘 나갔다. 슈피겔의 말처럼 “인생은 공정하지 않았다”. 슈피겔과 머피는 스냅챗을 28명이 일하는 조직으로 키워냈다. 캘리포니아 베니스에 새 사무실을 얻었으며, 수조원의 가치를 평가받았다는 회사 중 하나로 회자된다.

▲ 여자친구 루신드 아라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씨넷>

스냅챗은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퓨리서치센터 인터넷 프로젝트는 최근 “미국 성인 휴대폰 이용자의 9%가 스냅챗을 이용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스냅챗의 절대 지지층인 10대를 제외하고 내놓은 수치다. 2년만에 스냅챗은 미국 SNS 이용자들에 인상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게다가 이제 슈피겔은 아버지와도 화해했다. 더 이상 아버지에 과도한 용돈을 요구할 필요도 없다. 6년전에 떠났던 집으로 돌아왔으며,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모델 여자친구도 생겼다. 그의 여자친구는 케이트 업튼, 크리시 타이겐 등 유명 모델의 동료인 루신다 아라곤(24)이다.
“나는 젋고, 백인이고, 교육받은 남성이다. 나는 정말로 정말로 운이 좋다”
“그리고 삶은 공정하지 않다. 만약 삶이 공정하지 않다면, 그것은 당신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그렇게 굴러가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삶은 공평하지 않다. 그러나 슈피겔의 성공을 배경으로만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는 자기 소신을 위해 모험을 걸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삶이 어떻든지 간에, 슈피겔은 이제 마크 저커버그에도 “싫다”라고 말한 젊은 청년 기업가로 기록될 것이다. 그의 판단이 옳았던 것인지, 아니면 단지 젊은이의 치기였을지는 시간이 지나야 증명될 것이다.
씨넷은 그를 아는 친구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슈피겔은 정말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믿어요. 그것에 대해 매우 확고하고 단단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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